대체 정체가 뭐냐, Bagatelle!
: 매우매우매우*** 잘 치고 싶으다, 이런. 연습실 떠나기가 이렇게 아쉬울 줄이야.
알다시피 바가텔을 선택한 이유는 베토벤을 쳐보자 하시는 선생님의 권유에, 호흡 길고 콩나물이 무지막지한 소나타를 시작하기에는 가슴에 묵직한 돌 하나 얹는 것 같아서, 쉬어가자며 들고 간 것이고, 눈으로 보기에도 귀로 듣기에도 조금은 가벼워 보인달까, 심지어 이름조차 가벼운 소품이라는 의미의 "Bagatelle"이라서 정말 편한 마음으로 시작한 터였다. (영어사전에는 '하찮은 것'이라는 의미도 있다. 어머낫!) 여타의 피아노 카페나 유튜브를 보아도 바가텔을 연주하는 취미생들은 별로 없어서 곡에 대한 기대보다는 그저 다음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한 숨 고르겠다는 얄팍한 심산이었달까.
어라, 그런데 이 Bagatelle이 나를 연습실에 주구장창 붙들고 있다.
시작한 지는 이제 한 달이 채 못 되었는데, 11곡 중에서 벌써 5번째 곡까지 읽었고, 악보 짚어가면서 치는 중에도 그 선율과 흐름이 놀랍도록 아름답다는 걸 느끼게 되어서, 잠시 손을 멈추고 숨을 고르게 된다. 어마낫, 화성 속에 숨겨진 가락이 이렇게 예쁠 줄이야. 물론, 내가 그 맛을 살린다거나 또는 즐기면서 친다는 건 전혀 아니다. 나의 실력과는 전혀 별개로, 내가 아무리 더듬더듬 박자를 세어가며 쳐도 악보에 감춰진 음들은 결국 제 소리를 드러내게 마련이고 지속음과 화성들이 서로 왔다리갔다리 하며 곡을 아름답게 끌고가는 느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으아악~ 물론, 아름다운 만큼 내가 더!더!더! 잘 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지만 말이다. ㅜㅜ
그래서 요즘 나는, 잠이 한참이나 부족한데도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못하고, 11시를 넘겨 집에 돌아오곤 한다. 집안이 난리부르스, 점심은 김밥으로 때우고, 수영은 몸이 무거워 가라앉을지언정 각 곡들의 매력을 한껏, 내 손으로 발산시키고 싶은 마음이다. (2번은 넘나드는 왼손이 더 가벼웠으면 좋겠고, 3번은 시작하는 화성을 더 풍성하게 했으면 좋겠고, 4번은 각 성부의 흐름이 안 끊겼으면 좋겠고, 5번은 트릴을 제대로 칠 수 있었으면 좋겠고... 흐음.. 오늘도 연습실서 일찍 일어나기는 글렀다. 한편으로는 좋고, 한편으로는 피곤.....ㅎㅎㅎ;;;)
음악이란 이런 것일까. 이렇게나 사람을 흔들어놓는 것일까. 자꾸 사람보다 피아노가 더 좋아지는 요즘이다.
아니, 다시.
베토벤이란 이럼 사람인가, 이렇게나 짧고 단순한 흐름 속에 다양한 감동과 생생하고 서러운 아름다움을 숨겨놓다니.. 베토벤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나로서는 다른 이들이 베토벤을 왜 그렇게나 추앙하는지를 진지하게 알아봐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토벤, Bagatelles, op.119
어서어서 퇴근시간이 되어라.
2022. 7.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