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니, 어디까지 해봤니?
: 체르니에 대한 초보의 잡생각
벌써 20년도 훨씬 전의 일이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 수학 교재는 단연코 '수학의 정석'이었다. 정석은 모든 학생의 필수 교과서였고, 영어는 성문기본이 필수 교재였다. 거기에서 조금 더 잘하면 다른 교재로, 또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천재출판사의 '천문제 어쩌고'가 있었고 영어도 성문 기본이나 종합 외에 맨투맨이나 '리더스 어쩌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수학은 정석, 영어는 성문이 바이블이었던 시절에 공부했었다. 그런데 졸업하고서, 아니 그후로 한참 지나 사회생활을 할 때쯤 알았다. 정석이든 성문이든 그건 단지 수많은 교재 중 하나였을 뿐이다. 학교에서 배워야 했던 건 일상에 수학적 사고를 접목시키는 응용력과 계산력, 논리력이었고, 영어는 외국인과 소통할 수 있거나 원서를 읽어서 해독할 수 있는 정도의 소통능력이었다. 그때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는 아프락사스의 경험을 했다고 해야 할까. 고딩 시절 정석이나 성문만 죽어라 팠던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셈이다. 장황하지만 이런 경험을 읊어보는 건 초보로서 피아노의 체르니가 이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바이엘과 체르니는 한때 피아노 교육의 바이블이었고, 지금도 나는 체르니를 손에 붙잡고 있다. 또 한편 누군가가 자신의 피아노 수준을 얘기할라치면 으레 체르니 몇 번을 이야기하고 상대방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다. 그리고 나와 같은 시대에 자라난 학부모들은 자식들에 피아노를 교육시키면서 체르니를 요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 체르니는 피아노 학습의 기준이 되어버렸달까, 또는 거쳐야 할 통과의례가 되었달까. 여기에 물들어 있던 나였고, 체르니를 익히면 어떤 곡이든 잘 쳐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성급하게 체르니 100을 잡아먹고, 체르니 30을 우겨 시작하고 있는 중이다. 마치 수학의 정석을 끝내면 모든 문제를 다 잘 풀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런데 요즘 선생님들은 생각이 좀 다른 듯하다. 체르니 100은 시작하더라도 30은 아예 쳐다도 안 보는 사람도 있고, 피아노 교재의 다른 시리즈로 가르치는 분들도 있고, 혹은 자신이 만든 교재로 가르치기도 한다. 울 선생님도 그중의 한 분으로, 다른 교재로 옮긴다기보다 내가 하고 싶은 곡을 물어보고 그 곡에 중점을 두어 더 오래 가르친다. 이 부분은 어떤 느낌이어야 하는지, 이 부분에서 주의해야 하는 건 무엇인지 등등. 그렇다 보니 체르니 넘기기에 조급했던 나로서는 조금 의아해 하기도 했다. '저희, 체르니 언제 해요?'의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제는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체르니는 전공자들을 위한 테크닉 교재이다."
물론 이 명제는 체르니 30의 후반부와 그를 넘어가는 교재들을 이야기하는 것이겠다. 또한 전공자뿐만 아니라 바흐나 베토벤의 고전부터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곡을 섭렵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필수 교재이고, 훌륭한 테크닉 교재라고 한다. 그러나 나처럼 쉽고 즐거운 음악생활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어쩌면 필요없는 부분일 수 있으니, 안 되는 체르니 부여잡고 끙끙대며 손의 통증을 야기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곡의 안 되는 부분을 잘하기 위해 더 노력하라는 이야기이다. 블로그에서 유명한, 피아노 쌤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아리엘 쌤 역시 "체르니 100을 제대로 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 "체르니 번호를 정복하기보다는 곡을 정복하는 데 더 힘을 쏟아라", "굳이 30, 40, 50을 치겠다면 한 페이지를 하더라도 제!대!로 표현해라"며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나 역시, 체르니 30으로 넘어와 한 달에 한 페이지를 겨우겨우 넘기면서 살짜기 좌괴감이 드는 찰나였다. '아무리 만학도의 굳은 손가락이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느린 거 아닌가..' 게다가 뭔가 불완전한데도 마지못해 겨우 페이지를 넘기는 선생님을 보며, 과연 체르니 30을 끝낼 수는 있으련가.. 싶었다. 그야말로 체르니 30은 100과는 달리 리듬도, 흥도 없이 부지런히 손가락과 손목을 움직이고 악상의 느낌을 찾아야 하는, 참 재미없고 어려운 콩나물의 집합이었다. 그래서 연습시간에도 다른 곡만 치다가 체르니는 연습실 나서기 전 의무감에 한두 번 치는 수준이었달까. 체르니 30, 40에서 좌절하며 피아노를 그만두었다는 사람들도 많다는데,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는 게 아닐까, 불안하기도 했다. 그런 마당에 체르니가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들은 나를 솔깃하게 만든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피아노를 왜 치는가 생각해본다.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 내가 피아노를 쫌 친다고 뿌듯하게 말할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는지 돌이켜본다. 그래서 누구든 들으면 알 만한 체르니 몇 번, 몇 번을 고집하는 건 아니었는지..(소위 학부모들이 자랑스럽게 '우리 애는 체르니 40을 끝냈어요. 호호호' 하는 것처럼 말이다.) 급반성하고 나니 연습시간에 곡들에 더 힘쓰느라 체르니를 한 번도 못 치고 집에 가더라도 이제 조바심 나거나 우울해지지는 않는다. 체르니는 언제고 시간이 날 때 연습하면 될 일이다. 나는 체르니를 치기 위해 피아노를 치는 게 아니다, 피아노를 치기 위해 체르니 연습을 조금 더 할 뿐이다. 체르니에서 배워야 하는 스킬이 있다면 곡을 통해 배우면 된다. 그건 늦는 게 아니라 즐거워지는 일일테니..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개운하다.
"체르니, 아니어도 충분하다"
2019. 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