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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 Camino

카미노의 중반 돌입

날라리 빵꾸인생 2024. 7. 29. 23:59

: 안정된 하루의 루틴, 단단해진 근육, 더 이상 설레지 않는 풍경들

깜깜한 새벽길을 한참 걸어온지라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석은 만나지 못했으나, 어제 420킬로대를 확인했으니 오늘 또는 내일이면 남은 거리의 앞 자리가 3이 된다. 어느새 절반을 지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걸으면서 주변을 대하는 나의 태도라든지, 생각하는 주제라든지, 녹음하는 횟수가 줄어들기도 하였다. 대신 하루의 루틴이 견고해졌고, 배꼽시계가 그 루틴에 맞추어졌고, 다리의 아우성도 좀 잦아들었고 또 스페인의 물가도 대략 가늠이 된다. 어느새 카미노도 일상이 되어 가는 중이다.
날짜를 계산해보니 산티아고까지는 약 18일 정도 남은 듯하고, 피스테라, 묵시아까지 포함하면 23일 정도 일정이 남았다. 아마 또 산티아고를 100킬로미터 앞둔 때에는 내 생각과 길에 대한 태도가 어찌 변할런지는 두고볼 일이다.
오늘 걸으면서는 내가 가진 물건에 대해서 생각했다. 걷는 용품을 제외하고 단 한 벌의 여분의 옷, 칭남, 약들, 비누 하나, 로션 크림과 바디오일, 수건, 스틱커피, 빨래줄, 안티푸라민, 물통, 초코바 하나면 충분하다. 물론 지금의 특수한 상황, 그러니까 길 위라서 가능한 일이다. 우리 집을 돌이켜보았다. 사실 쓰지 않는 물건과 책과 용품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없어도 되지 않을까? 카미노에서 반드시 필요할 것만 같았던 물건들이 없어도 아무런 불편을 야기하지 않는 것처럼, 집안의 물건들도 그렇지 않을까. 그저 나의 우려와 불안이 그 짐들을 못 버리고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돌아가서도 좀 가벼워져야겠다.
나의 시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 중이다. 그러니까 늘 시간이 없어 허덕이던 한국의 일상에 비해 여기서는 필요한 만큼만 쓰고도 늘 시간이 남는다. 역시나 단순함의 힘이다. 나의 할일들을 줄이고 시간을 단순하게 계산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너무 욕심을 내거나 복잡해지지 말자. 걷기만 하는 지금 2개월의 카미노가 나를 충분히 만족시키는 것처럼, 단순한 집중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느끼는 시간의 가치와 즐거움은 충분할 테다.
카미노 길 위에서 사실 신의 계시라거나, 가르침이라거나 순간의 깨달음은 없다. 나를 비롯해 다들 그런 경험을 바라고 여기에 섰을지도 모를 일이며, 이를 반증하듯이 카미노를 걷고 달라졌다는 항간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나 카미노 길은 그저 800킬로는 걷는 만큼의 시간과 공간을 제공할 뿐이다. 대개 혼자뿐인 길 위에서 그저 끊임없이 스스로를 살펴보며 질문하고 대답하고 또 질문하고 대답할 만한 시간과 공간 말이다. 게다가 걷는 행위 그 자체의 위대함은 말해 무엇하랴. 그것이 카미노의 힘이다.

2024.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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