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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 Camino

나의 자유

날라리 빵꾸인생 2024. 8. 8. 03:20

: 그 분명한 순간

따가운 햇살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포도밭을 오르다 언덕 위 밤나무가 만드는 그늘진 곳을 발견했다. 저 멀리서는 하연 모자를 쓴 몇 분이 포도를 따시는가보다. 설마 내가 저기 앉아 잠시 쉬어간다고 뭐라 하지는 않으시겠지, 주섬주섬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를 잡았다. 일단 물을 좀 마셔 목을 축인다, 좀 살 것 같다. 이놈의 햇살은 배려가 없다. 어제 사 둔 비스킷도 꺼내 깨물었다. 초코가 든 비스킷으로 산 건 잘한 거 같다. 이런 날은 당이 필요하다.
이 코스는 다른 코스보다 길기도 하고, 땡볕인 포도밭 사이를 하염없이 지나는지라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냥 고요히 앉아서 바람에 땀을 식히고, 펼쳐진 포도밭에 눈을 얹어두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고요해지는 때이다. 뭔가 아쉬워 무작정 피아노 연주를 틀었다. 여느 영화 부럽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아, 나는 자유하는 중이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저벅저벅, 누군가 뒤에서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딱히 돌아보지 않았다. “부엔 카미노” 인사도 이렇게 햇살 가득한 오후가 되면 누구도 하지 않는다. 이미 기운이 없어서다. 그렇게 순례자를 보내고 내 머리는 슬금슬금 계산을 시작한다. 지금보다 늦으면 더욱 땡볕에 걸어야 하고, 마트는 문을 닫을테니 5시까지는 굶어야 하고, 내일 걸을 길도 긴데 기운 빠진다고 속삭인다. 그러나 마음은, 그저 조금 더 이 자유를 누리자고, 얼마 만의 행복이냐며 따져 묻는다. 아, 그냥 다음 한 곡만 더 듣고 일어서기로 했다.
아무래도 기록해두지 않으면 나의. 그 자유를 또 잊어버릴 것만 같아서, 어설프게마나 정리해둔다.
나는 오늘 조금이나마 자유했다.

2024.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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