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play it again

치고 싶다는 생각

날라리 빵꾸인생 2019. 11. 29. 14:15

: 악동뮤지션의 '뱃노래'와 선우정아의 '그러려니' 

지금의 피아노 쌤에게서 레슨을 받던 초기에 쌤이 가요를 권한 적이 있다. 한창 초급단계이고 소리도 참 엉성하기 짝이 없던 시절, 칠 수 있는 악보가 별로 없었던지라, 쌤이 주신 초급용 가요반주 책에서 헤이즈의 '비도 오고 그래서'와 지드래곤의 '무제'를 선택했다. 일단은 아무리 초급용으로 편곡되었다 하더라도 곡이 예뻤고, 또한 가요인지라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도 할 수 있었던 데 대한 신기함과 새로움, 심지어 지드래곤에 대한 견해도 다소 바뀌는 등의 경험을 한 바 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대상 악보가 늘어나고, 선생님의 권유에 힘입어 라라랜드의 'City of Stars' 또는 캐리비안 해적, 장세용의 '달에서의 하루', 정재영의 '사랑하는 이들에게', 김광민의 젓가락 등으로 이어졌다. (이런 악보는 다소 선생님과 나의 취향이 섞어 있는 듯도 하다.)

여튼. 클래식 피아노에 우선 집중하겠다는 나에게 가요는 레파토리를 만들래야 만들 수 없던 시절의 선택이었는데, 최근 악동뮤지션의 음반을 들으면서는 자꾸 피아노로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뱃노래"가 그랬고,"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가 그렇다. 이 곡들은 심지어 피아노 반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악보 사이트를 뒤져 찾아냈다. 내친김에 예전부터 마음에 걸리던 곡도 찾아봤다. 선우정아의 '그러려니'. 한동안 나의 플레이리스트에서 무한반복되던 곡이다. 어쩌면 나이가 들고 나니, 예전에는 반발부터 생겨나던, 삶에서 어찌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이제는 인정하고 수긍하는 지점이 더 많아진 것 같다. '그러려니..' 특별히 가사를 덧붙이지 않고 반주만으로도 그 끄덕임의 순간을 느꼈던 곡이랄까. 

새삼, 이 곡들의 음악적 감수성 또는 음악의 힘을 이야기하고자 함은 아니다. 단지, 피아노를 치게 되면,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음악이든 그로부터 받는 영향의 밀도가 꽤 커진다는, 내 경험을 짚고자 함이다. 내가 피아노를 치면서는 클래식 음반을 들을 때에도, 전에는 알 수 없었던 기교를 느끼면서의 찬탄이 생겨나고 또한 그 흐름을 만들어내고 유지하기 위한 연주자의 심혈과 노력이 한층 다가왔고, 이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연주자의 곡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어도 조금의 실마리는 느끼고 깨달아 가는구나, 앎에서 비롯되는 높은 감정의 파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영역이 클래식을 넘어서 대중적인 가요에 이르기까지 음악으로 구성된 많은 영역으로 확장된다고 생각하니, 내 삶의 폭이 한층 넓어졌음을 실감하게 되는 계기랄까. 

한동안 세종시에서 집, 회사, 수영, 피아노만으로 구성된 내 삶의 테두리가 무척 빈약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나 역시 일상의 쳇바퀴에서 다른 세상이 있음을, 다른 감동과 이야기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홀로 빙글빙글 갇혀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함에 안절부절 서성이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적어도 내게 피아노로 치고 싶은 리스트가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런 걱정은 매우 쓰잘데기 없는 방해꾼이라는 데 동의해야겠다. 

지난 주말에도 피아노를 치겠다고 작정하고 방구석에 처박혀 이것저것 눌러보고 혼자놀기에 심취해 있었다. 아무래도 당장 내일도 악뮤와 선우정아의 악보를 들고 방 안에 틀어박혀야 할 모양이다. 내 마음의 감동, 내 인생의 서사시를 만들어야 하겠기에. (혹시 내 핸드폰이 꺼져 있다고 걱정하시지는 마시기를...)

2019. 11. 29. 

 

'play it agai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하는 습관, 변하는 몸, 의지만 있다면야  (0) 2020.04.23
하농의 세 번째  (0) 2020.02.06
'이쯤이면 되겠지!'는 어른의 오만이다  (0) 2019.11.27
"공포"의 아라베스크  (0) 2019.11.25
하농의 두 번째  (0) 2019.11.25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6/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