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분명한 순간 따가운 햇살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포도밭을 오르다 언덕 위 밤나무가 만드는 그늘진 곳을 발견했다. 저 멀리서는 하연 모자를 쓴 몇 분이 포도를 따시는가보다. 설마 내가 저기 앉아 잠시 쉬어간다고 뭐라 하지는 않으시겠지, 주섬주섬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를 잡았다. 일단 물을 좀 마셔 목을 축인다, 좀 살 것 같다. 이놈의 햇살은 배려가 없다. 어제 사 둔 비스킷도 꺼내 깨물었다. 초코가 든 비스킷으로 산 건 잘한 거 같다. 이런 날은 당이 필요하다. 이 코스는 다른 코스보다 길기도 하고, 땡볕인 포도밭 사이를 하염없이 지나는지라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냥 고요히 앉아서 바람에 땀을 식히고, 펼쳐진 포도밭에 눈을 얹어두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고요해지는 때..
폰페라다를 벗어나면서부터 줄곧 포도밭이다. 처음에는 그저 포도밭이구나 했는데, 언덕을 넘자마자 펼쳐지는 게 포도밭이다. 보성 녹차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넓고 광대하다. 마치 고등학교 때 보았던 영화같았다. “구름 속의 산책”이던가? 그곳이 스페인이었는지 이탈리아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광활한 포도밭은 당시에도 꽤나 충격이었다. 그런 포도밭을 마주하고 있자니 새삼 감동스러웠다. 포도밭 언덕 위 밤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 아래서 한참을 감상하다 왔다. 초반의 리오하 지역을 지날 때에도 포도밭에 와인 양조장이 드문드문 보였고, 오늘도 와인 브랜드인 듯한 명칭이 밭 가운데 드문드문 보인다. 여기도 못지 않은 와인 생산지역일거라는 느낌이 마구마구 든다. 아침에는 카미노 길 근처에 와인 테이스팅 바가 있어서 블..
: 자유의 느낌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 폰페라다에서 나오는데, 템플기사단 성을 마주하고 후회했다. 어제 성을 좀 둘러봤어야 했는데, 그 정보를 모르고 있었다. 물론 피곤해서 쓰러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 새벽에 좀 서성이다 왔다. - 폰페라다부터 시작하는 순례자도 있는가보다. 사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가 뭐 그리 중요한가, 그저 길 위에 같이 서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응원해주었다. - 이제 옥수수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오늘은 하루종일 포도밭 사이를 걸었다. 와인밭 한가운데서 쉬는 것도 좋았다. 오늘에서야 카미노 이후 처음으로 자유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되었다. 뭔가 나는 자유하고 있다. - 아직도 끼니 해결은 내게 숙제다. 오늘도 마트에서 샐러드를 먹겠다며 집어들고, 적절한 드레싱으로 야채즙..
: 휴양도시, 별장지 같은 몰리나세카. 참 예뻤다. - 멀쩡하게 아침 먹고 인사하고 나서려는데 셀린이 안아주어서 또 눈물 흘릴 뻔. 꾹 참고 나왔다. 밖은 새벽이라 많이 추웠다. - 철의 십자가는 그다지 멋있지 않았다. 십자가보다는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이 더 멋있었다. - 와 정말, 내리막 작렬이다. 이렇게나 올라왔던가 싶을 정도로 계속해서, 하루종일 내리막이다. 그러나 뷰는 어찌나 예쁘던지 자꾸 발이 돌에 채여도 눈은 앞산과 옆산과 구름을 향해 있었다. - 왜 이 구간을 아름답다고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지 않았겠지만, 나는 이제서야 알았다. 피레네 못지 않게 아름다웠다. - 다만, 정말 험난한 구간이었다. 어떤 분이 생장에 버금갈 만큼 힘들었다고 했는데, 이해가 된다. 엉금엉금 겨우겨우 스틱으로..
: 나는야, 카미노의 거북이 길을 걷자면, 하나둘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간다. “부엔카미노~” 지나가는 그들이, 또는 길을 비켜주는 내가 서로에게 건네는 인사다. 지나가다 보면 앞서간 그들이 마을 Bar에서 쉬고 있다. 그러면 쉬고 있는 그들이, 지나가는 내가 또 인사를 한다. “부엔 카미노~” 다시 한참을 걷다보면 아침의 그 사람들이 또 나를 지나쳐간다. “부엔 카미노~” 그리고 다시 내가 그들을 지나칠때면 서로 마주보고 웃는다, 이제 우리는 인사 따위는 필요없는친구가 되었다. 2024. .8. 6 하루에도 몇 번 스쳐 지나가는 우리는 카미노의 토끼와 거북이다. 단지, 우리의 동화에서는 이기고 지는 게 없다는 것뿐. 그저 우리 스스로의 길이 있을 분이다.
: 등산 난이도보다는 인터넷이 안 터져 답답했던 날 - 아스토르가 나오는 길이 아쉬웠다. 정말 예뻤던 도시, 성당의 대리석은 새벽에도 아름다웠다. - 조금씩 오르막이다, 그래도 날이 좋아서 걷기 좋았다. 어제 사둔 빵을 먹었다. 근데 바케트는 그닥, 차라리 이전에 사둔 빵이 훨씬 맛있었다. - 마리아와 헤어졌다. 그래도 길 위에서 언제 다시 만나겠지? - 폰세바돈의 매운 맛은 한라산 느낌이다. 고산에 급경이고, 옆의 식생들도 모두 키가 작고, 바람은 다소 매섭다. 모두 헉헉거리며 올랐다. - 선착순인 공립알베르게, 도달하니 딱 내가 마지막이었다. 다들 앉아서 나를 쳐다보는데, 다소 부끄럽기도 했다. - 셀린의 소모임. 다소 경계하며 앉아 있었는데, 적어도 그 자리에 온 사람들은 열린 마음이었는가 싶기도 ..
: 지나치기보다는 머물러야 느낄 수 있다. - 산중이라 그런지 새벽 6시여도 너무나 깜깜했다. 가다서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드디어 누군가가 뒤에 따라왔을 때에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새벽 출발은 동행이 있고없음에 따라 느낌이 매우 다르다. 별은 오늘도 총총했다. - 어제부터 시작된 무릎통증이 심상치 않다. 아끼는 동전 파스를 붙였다. 이제 2개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래도 다음 마을에서 오늘은 접어야겠다. - Astorga는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는 지점에서부터 아름다웠다. 와, 오늘 쉬어가는 마을이 아스토르가여서 다행이었다. 마음도 홀가분했다. - 일단 가방을 알베르게에 맡기고 걸었다. 가방 없이 걷는 가벼움이란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가우디 건물을 보고 대성당을 보고 근처 호텔 카..
: 빵을 건네드리려고 길목에서 기다리는 중인데 안 오신다. 벌써 지나가셨으면 어쩌지. 그러니까 어디서 처음 만났더라.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그분을 인식하게 된 건 카스트로헤리츠이다. 나보다 먼저 도착해 한쪽 구석에서 알베르게 오픈을 기다리던 조그만 할머니. 그리고 옆에 맨 가방에서 다 해진 비닐봉투를 꺼내 요금을 지불하던 가냘픈 손 때문에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 분은 스페인어도, 영어도 잘 못하신다. 그저 간단한 대답과 단어 수준이다. 뭔가 설명이 필요한 경우는 불어로 대답을 해서 알베르게 봉사자가 불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도 했다. 언어에 대한 장벽 때문인가 할머니는 그저 구석에서 조용하게, 옆에 맨 색에서 조무락조무락 뭔가를 살펴보거나 비스킷을 드시거나 하시는 게 다였다. 프랑..
: 씻고, 빨래하고, 쓰고, 잘 수 있으면 된다. 그러고보니 먹는 건 또 뒷전이다, 내게. 아…. 지금 이 곳은 진짜 시설이 낙후하다. 난방은 안 된다고 당당히 적혀 있다. 게다가 샤워실의 잠금장치도 고장 나서 누구든 문을 열 수 있고, 방문은 이미 제 자리에서 벗어나 자꾸 덜거덕거린다. 사람들이 많은 곳을 피한다고 이미 하루 일정보다 5킬로를 더 걸어서 찜해 둔 알베르게에 갔는데 8월 5일까지 휴가라 하고, 비싸지만 근처에 있는 또 다른 알베르게는 이미 다 찼단다. 다시 되돌아가려는데, 풀부킹 알베르게 주인장이 2킬로 넘어서 알베르게가 있다는 말에 더운 한낮에 이미 지칠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온 곳이 여기다. 알베르게가 낙후하다고 더 갈 수도 없고, 되돌아갈 수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투숙객이 나 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