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정된 하루의 루틴, 단단해진 근육, 더 이상 설레지 않는 풍경들 깜깜한 새벽길을 한참 걸어온지라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석은 만나지 못했으나, 어제 420킬로대를 확인했으니 오늘 또는 내일이면 남은 거리의 앞 자리가 3이 된다. 어느새 절반을 지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걸으면서 주변을 대하는 나의 태도라든지, 생각하는 주제라든지, 녹음하는 횟수가 줄어들기도 하였다. 대신 하루의 루틴이 견고해졌고, 배꼽시계가 그 루틴에 맞추어졌고, 다리의 아우성도 좀 잦아들었고 또 스페인의 물가도 대략 가늠이 된다. 어느새 카미노도 일상이 되어 가는 중이다. 날짜를 계산해보니 산티아고까지는 약 18일 정도 남은 듯하고, 피스테라, 묵시아까지 포함하면 23일 정도 일정이 남았다. 아마 또 산티아고를 100킬..
: 짧은 거리이기도 했고, 일찍 와서 시간이 겁나 남았다. 오늘은 휴일이다, 쉬고 놀테다. - 이제는 20킬로가 짧은 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동은 씨는 17킬로를 더 걸어 다음 마을까지 간다. 아니 5킬로, 10킬로도 아니고 17이라니.. 내게는 무리일 것 같아서 나는 남았다. 새벽 5시에 시작해서 도착하니 10시 반이다. 아고야, 시간이 너무나 남는다, 앗싸~ 놀아야지 ^^ - 새벽길, 동은 씨랑 마지막일 것 같아서 같이 걸었다. 그런데 쫓아 걷자니 황새 쫓아가는 뱁새 격이다. 그런데 신기하게 다리가 아프지는 않아서 약 6킬로를 동은 씨 속도에 맞춰 걸었다. 그러나 동은 씨 역시 나 때문에 천천히 걸은 것이리라. 그러다가 6시 넘어 날이 어스무레하게 밝아오자 보내고, 나는 다시 내 속도를 찾았다. 휴우..
: 그러니까 어디까지 갈지는 물어보지 말아야겠다. 오늘은 어디에서 묵을지, 얼마나 걸을지, 어디에서 쉬어갈지를 물어 무엇한다 말인가. 길은 어차피 각자의 몫이다. 같은 길 위에 있지만 우리는 동행도 아니며, 그저 길 가다가 만난 사이에 불과하다. 길 위의 선택과 결정은 온전히 나의 몫이며, 그들의 몫인 것이다.그런데도 우리는 흔히들 쉽게 어디까지 가는지를 묻곤 한다. 아마도 나의 선택이 적절했는지를 확인하는 마음일까. 또는 그 사람에 대한 호감과 관심인 걸까. 그것도 아니면 불안함을 잠재우기 위한 비교일까.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그저 타인의 목적지일 뿐이다. 만날 일이면 만나게 될 것이고, 혹여 속도가 또는 일정이 다르다면 또 이대로 헤어지게 될 일인바, 어떠한 경우든 자연스러운 일이다. 타인의 목적지를 ..
: 다리 생각보다는 자연을 더 많이 생각한 날 - 하다보니 5시쯤 출발했다. 깜깜한 거리를 약 두어 시간 걸었는가보다. 그래도 달빛이 밝아 세상 분간은 되었다. - 왜 다들 메세타를 건너뛰는지, 아쉬울 뿐이다. 햇살 피할 곳은 정말 없으나 그 문제만 해결한다면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 있는 곳이다. 한동안 서서 평원을 바라보았다. - 아마도 프란체스코 수도원인가. 밀밭 한 가운데, 다리 건너기 전에 딱 한 채 있는 각 진 건물이 소박하면서도 위엄 있었는데, 다가가서 보니 프란체스코 수도원인가 싶다. 한참을 바라보다 왔다. - 와우 강 건너의 풍경은 지금까지의 먼지 흩날리는 밀밭과는 차원이 다른 녹음이었다. 밭에서 푸릇푸릇한 작물이 자라고 있고, 길 주변에는 키큰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지금까지의 메..
: 현재 36도………… 아, 카미노. 38도 날씨에서 어떻게 살지?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지금 여기 날씨가 36도이고, 오후 5시가 지났는데도 기온은 떨어지지 않고 더 오르는 중이다. 이따 6시에는 38도가 된단다. 와우~ 진짜 더워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여기 알베르게는 큰 방에 이층침대 15개가 놓여있고, 두어 개를 제외하고 모두 들어찼다. 거기에 여느 알베르게와 같이 에어컨은 볼 수가 없고, 가운데에 큰 팬이 하나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햇빛 가리느라 모든 창문은 닫혀 있고, 남성들은 이미 웃통을 벗었으며, 샤워를 여러 차례 한 사람도 있다. 보통은 이 시간이면 시원한 바람이 부는 그늘에 앉아 있게 마련이고 그렇게 있다보면 다소 싸늘한 기운도 느껴지는 게 여기 스페인 지방의 날씨이다. 헌데 ..
- 호르니요스에서 카스트로헤이츠까지 20킬로. 왠지 좀 짧다는 생각, 그러나 다음 마을까지는 30킬로 이건 너무 멀어서 다리가 용납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 이 두 생각이 싸우느라고 길을 잘 못 봤다. 그러나 결국 다리가 아파서 주저앉았다. - 메세타 평원의 일출은 자주 나를 불러세웠다 - San Anton이라는유적지를 지나왔다. 와우 무너졌지만 남아있는 기둥과 정문에서 느껴지는 위풍당당함이란. 가히 멋있었다. - 산타마리아 데 몬자노 성당에 들렸다. 스탬프 찍는데 1유로. 부르고스 성당의 여러 챔버 구성 양식을 여기서도 확인한다, 게다가 못지않게 바로크적이다. - 알베르게는 12시 30분에 도착한다는데, 덥다고 새벽에 출발한 순례자들은 그 앞에서 기다리는 중이다. 덥다 더워. - 마트에서 몇 개 샀는데,..
: 몸의 아우성 = 힘듦 몸의 온갖 곳에서 아우성 중이다. 어깨는 이미 가방 때문에 패인 지 오래이고, 무릎은 이제 보호대 없이는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고, 허벅지와 엉덩이는 속도가 조금만 오를라치면 전기 충격이다. 새끼 발가락은 이미 새까매져서 곧 빠지겠구나 하고, 이제 스물스물 발목이 소리 지를 기세이고, 다리 때문에 스틱에 힘 주어 의존하다보니 가끔 손목도 찌릿찌릿하다. 가방이 조금이라도 제자리에서 벗어나면 허리가 시큰대고, 풀업하던 상체에서 힘이 빠지면 당장 엉덩이로 무게가 전해져 움직임이 서걱댄다. 몸의 아우성이다. 제각각 아우성인 녀석들에게, 저 앞에 마을에서 쉬겠다고 하고, 속도를 줄이겠다고도 하고, 자꾸 꼬장부리면 안티푸라민 안 발라주겠다고 협박하고, 어르고 달래며 걷는 중이다. 2024. ..
: 시골이라서 시골인데, 너무 시골스럽다고 투덜대는 중인가 그래도 물을 살 곳은 있을 줄 알았다. 사람 사는 곳인데 대규모 마트는 아니어도 구멍가게 정도는 있지 않을까. 과일 하나는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생장에서 나누어 준 일정표상에도 분명한 경유지인 숙박 마을이므로 분명 순례자들을 위한 가게는 있겠거니 했다. 그러나 엊그제 묵었던 곳은 마켓이나 숍이 하나도 없었고, 오늘 역시 마을에 하나 있는 구멍가게는 호텔 조식에나 있는 딸기잼 하나가 1유로인,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바가지만 잔뜩 씌우는 작은 가게 하나가 유일한 가게였다. 이게 카미노의 시골마을이다. 그나마 알베르게에 자판기가 구비되어 있거나 음료나 음식을 판매한다면 거기에서 먹을거리나 물을 해결하면 된다. 다만, 비싼 것을 각오해야 한다. ..